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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미자의 요가이야기27 -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작성자
이도경
등록일
2013-07-04
조회수
1136
첨부파일
오피니언특별기고
[곽미자의 요가이야기(27)]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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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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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미자 춘해보건대 교수·요가과  
 

어느 천문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천문학자들이 관측하는 우주를 지구만 하게 줄이면, 지구는 그 안에서 수소 원자보다 작아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지구라는 별에서 살면서 지구만한 크기의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겸손해야겠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수학적으로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가 그 정도라고 하니 실제로 우주는 무한하다고 봐야겠다.

그 무한한 우주공간을 탐색하는 요가의 전통적인 명상법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바야 아까샤 명상이라고 한다. 바야는 외부를 나타내며, 아까샤는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부공간을 자각하는 명상법이다. 이때 외부공간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나타낸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시공간의 총체로서 우주를 상징한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경계가 없듯이 우리의 의식도 무한하며 경계가 없다는 것이 요가의 철학이다. 우리의 의식은 무한하지만 마음의 한계에 부딪혀 한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모두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한계가 없음에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착각이다. 한계를 제외한 나머지는 잠재력이다. 잠재력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모두 실현한 의식을 무한한 의식이라 하며 다른 말로 우주 의식이라고도 한다.

높은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볼 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고요는 어디서 올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의식의 확장이라 본다. 높은 빌딩이 조그마한 성냥갑처럼 보이고 큰 도로도 오솔길처럼 보이려면 그만큼 나의 시야는 높아야 한다. 산의 정상이 아니라 로켓을 타고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공간으로 들어가 나의 의식을 우주공간 크기만큼 확장하면 지구도 한 점 점보다 작게 여겨질 것이다.

의식을 우주공간만큼 확장시킨다면 우주여행도 방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야 아까샤 명상은 고요히 앉은 상태에서 신체의 정수리만큼의 높이에 의식을 두고 자신의 몸을 바라보다가 점점 의식을 더 확장시켜 방안의 천장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이 방안 전체를 바라본다. 그 다음 건물의 옥상 높이만큼 의식을 확장시켜 건물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한다. 이런 방법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나아가 지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는 높이에서 보도록 한다. 무언가를 보려면 그것보다 의식이 더 높아야 함을 알게 하는 명상이다. 높이 나는 새처럼 나의 의식의 고도를 높일 때 그만큼 멀리 보는 것이다.

곽미자 춘해보건대 교수·요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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